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넬슨 만델라 (문단 편집) === '''투사''' 만델라 === || [[파일:attachment/mandela-mulroney.jpg|width=100%]] || || 1990년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elson_Mandela-2008_%28edit%29.jpg|width=100%]] || || 2008년의 모습 || || [[파일:347475_gallery.jpg|width=100%]] ||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모습 || [[1918년]] [[7월 18일]] [[목요일]]에 남아프리카연방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코사족]]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 "말썽꾸러기", "장난꾸러기"라는 뜻이다. 나쁘게 보면 [[문제아]]라는 뉘앙스일 수도 있지만, 자식 이름을 그런 뜻으로 짓진 않았을 것이다.]라는 뜻의 롤리랄라(Rolihlahla)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받았다.[* [[https://www.korean.go.kr/nkview/foreign/gpfor026.html|정부언론외래어공동심의위원회]]의 심의에 따른 표기는 '롤리랄라'이지만 실제 [[코사어]] 발음은 [xolíɬaɬa\]이며 '홀리흘라흘라'로 표기할 수 있다.] 넬슨(Nelson)은 [[초등학생]] 때 교사가 지어준 영어식 이름인데 이후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는 그의 정식 이름이 되었다. 16세 때 성인식을 치른 뒤 얻은 이름 달리붕가(Dalibhunga)는 '새로운 권력자' 를 뜻했다. 16세 때 치른 이 성인식은 [[할례]], 즉 [[포경수술]]인데, [[관우|마취없이 성인식을 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만델라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 정도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게 참을 수 있어야 된다"면서 포경수술을 찬성하였다. 남아공의 원주민에게 포경수술은 성인식으로 행해지는 풍습이다. 학교에 가게 된 만델라는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내용들[* 백인 이야기만 있으며 흑인들은 노예나 강도로 나오는 얘기]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으며, 축구와 복싱, 장거리 달리기 등의 운동도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사망한 아버지 대신 그를 돌봐주던 후견인이자 족장이였던 욘긴타바 달린드예보(Jongintaba Dalindyebo)에게서 아프리카의 역사와 진실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된 후 흑인들을 위해 일하는 꿈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땐 막연히 후견인인 달린드예보가 추장으로서 재판을 집행[* 영국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긴 했지만 소도시에서는 추장들의 권력이 유지되었다.]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부족을 위해 일하는 법 상담자가 되기 원했으나,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치고 나서는 넓은 세계를 보고 감명 받으면서 본격적인 [[변호사]]의 꿈을 꾸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그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으며 특히 강제 결혼을 시키려는 후견인을 피해 친구 올리버 탐보[* 만델라의 동료이며 남아공의 정치인 겸 민주화 운동가다.]와 함께 도망가 위장취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확한 내막은 만델라가 법대에서 주는 [[학식]]에 불만[* 사실 만델라의 이유도 정당한 것이 그가 다니는 포트헤어 대학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흑인을 받는 대학'''이었으나 학식이 너무 형편없었다.]을 가지고 투쟁을 벌였다가 정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후견인 달린드예보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여 투쟁을 중단하고 학업에 정진하라고 했지만 만델라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강제 결혼을 시키게 된 것. 강제 결혼에 만델라는 도망갔지만 끝내 사람을 보내 수소문한 달린드예보에 의해 그들의 행방도 알려지게 되었고 탐보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만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한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nelson-mandela-you_2466638c.jpg]] 복귀 후엔 훗날 남아공 민주화 운동을 함께 이끌게 될 동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절친 올리버 탐보까지 재회, 합세하여 셋이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를 일으켜 나가게 된다.[* 물론, 투쟁 과정에서 인도 및 여러 유색인들을 대변하는 당들과도 같이 일한다. 또 공산당과도 손을 잡았는데 자서전에서 만델라는 공산당이랑 손 잡는건 무척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혹은 아프리카 국민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서 남아공 옛 백인 정권의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그러나 이는 1948년 이후에나 공식적으로 실시 된 정책이다. 정식적으로 초기에 대항한 것은 인종차별 정책/사회일 뿐, 아파르트헤이트가 아니다. 하지만 시기가 겹쳐서 애매하긴 하다. 다만 아파르트헤이트의 전신격인 되는 정책들은 그때에도 있었으며 이 당시에도 대다수 흑인들은 참정권이 없었고, 소수의 부자나 토호같은 기득권층이나 투표권을 가졌을 따름이었다. 다만 컬러드 계층이나 아시아인들도 투표권을 가지기는 했기에 그나마 막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맞선 투쟁활동을 벌이게 된 만델라와 ANC는 처음엔 [[마하트마 간디|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받아들여 평화적 투쟁방법을 모색하였으나 [[현실은 시궁창]]. 남아공 정권이 친영국파인 연합당에서 반영국파인 국민당으로 옮겨졌는데, 문제는 이들이 연합당보다 몇배는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은 [[백인 우월주의]]에 꽉찬 놈들이라 원래 있던 암묵적인 사회적인 차별까지 법으로 확실히 새기는건 물론이고 거주지 이전법안까지 통과시키며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정식적으로 열고, 게리맨더링의 일환으로 컬러드의 투표권을 박탈하며 일당체제를 구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리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경찰을 보고 만델라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국민당과 싸우기 위한 군대를 만들기 위한 책임자가 된 만델라는 이 조직의 이름을 '민족의 창(Unmkhonto we Sizwe)'이라고 한다. 줄인 이름은 'MK'. 아프리카 민족회의에는 백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MK는 진보계열의 백인들[* 대표적으로 남아공 공산당 서기장이 된 조 슬로보(Joe Slovo)가 있는데, 그는 MK의 사령관직을 맡기도 했다.]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이후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사보타주]]와 테러[* 원래는 여러 해 동안 폭격은 건물에만 행해졌으나 나중에는 사람을 상대로 한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다.]를 행하다 결국 당국에 체포되어 [[종신형]][* 본래는 사형을 언도하려고 했으나, 만델라가 이를 잘 간파하여 은연중에 정치적인 재판으로 끌고가서 살 수 있었다. 만델라의 변호사 경험이 빛을 발한 것이다.]을 선고받고 무려 27년 동안 투옥되었다. 총 27년의 기간 중 [[로벤 섬]]에서 18년을 생활하였고, 이후 일정 기간은 국제 여론에 압박을 느낀 남아공 정부에 의해 감옥이 아닌 [[교도관]]의 집에서 보내게 된다.[* 영화 '굿바이 만델라'에서는 이 시기 만델라를 지켜보던 백인 교도관의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참고로 이 교도관하고는 꽤 친하게 지내서 대통령 관저로 초대해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장기간의 수감생활로 인해 자식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모친과 맏아들이 사망했을때에도 장례식에 참석을 할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수감생활 속에서도 남아공 대통령들에게 편지를 쓰고 ANC 회원들과 연락을 하는 등 할 것은 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고된 시간이었음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투쟁을 통해 교도소의 환경을 개선시킨다거나 하는 일을 벌였다. 그가 갇혀 있는 동안 남아공의 흑인들과 해외 재야인사들이 석방운동을 줄기차게 벌였고, 1988년에는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에릭 클랩튼]]과 [[스티비 원더]] 등 유명 뮤지션 83명이 그의 70세 생일 기념 콘서트를 열어 석방을 촉구했다. [[파일:external/static.guim.co.uk/Nelson-Mandela-and-wife-W-010.jpg]] 그리고 드디어 1990년, 국내외 여론의 압박을 못이긴 [[F. W. 더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의 석방과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합법화를 발표하여 그를 석방한다. 이후에 당시 남아공 정부와 국민당, 민주당, 인도계 정당, 컬러드계 정당들과 협상을 벌여서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시키고, 1993년에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만듬으로써 그해 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협상 후반기엔 극우정당인 보수당[* 남아프리카 국민당의 일부 과격파들이 탈당하여 만들었다.]과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이 협상에 반발하고 잉카타 자유당은 협상에 나섰다가 파기하다를 반복하고 ANC와 갈등을 벌여 한때 남아공은 [[내전]]으로 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지만, 반투스탄내 기득권층은 반투스탄 내 흑인들의 반발에 결국 굴복했고, 보수당은 자멸함에 따라 대다수 흑인들에게 첫 투표권이 주어진 1994년 총선이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ANC가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함에 따라(252/400 62.7%) 국민당, 잉카타 자유당과 거국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잉카타 자유당과의 분쟁도 진정되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참고로 남아공은 선거 방식이 다소 특이해서, 대통령을 의원내각제 총리 뽑듯 뽑는다. 즉, 총선을 해서 거기서 뽑힌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다. 때문에 대통령도 하원의원이어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